7일차.
빗소리에 아침일찍 잠에서 깬다.
어제 이장님께 아침일찍 추발한다고 말해놔서 짐정리를 하고 출발준비를 마친 뒤 이장님께 전화를 한다.
며칠전에는 그저 부슬비라 시원한 정도의 느낌으로 걸었는데 오늘은 본격적인 비.
처음으로 우의를 꺼냈다! 천원짜리라 별 기대도 안했는데 역시나 그닥 좋진 않다.. 크
신발이 젖기 시작한다.
양말도 젖는다.
발이 차다.
무언가 찜짐했던 처음의 느낌이 무색하게 어느순간부터 물을 헤집고 다니는 나를 발견한다.
어릴때 신나게 맞아본 뒤 이렇게 시원하게 비를 맞으면서 다니는건 처음인것 같다.
마을과 마을 사이를 이어주는 도로들.. 보니까 거의 다 저수지를 끼고 있다.
낚시터..
낚시 한번도 안해봤는데..
어렸을땐 아부지랑 낚시간다고 하는 친구들을 보면 부러웠었다.
샛길로 왔더니, 집도 뜨문뜨문 있고 읍내도 지나쳤는데 출출해져서 잠시 쉬어가기로 한다.
정류장에 앉자마자 엄청나게 쏟아지는 비.
참 신기하다..
팅팅 불었다.. 할아부지 발이 되어버렸다.. ㅋㅋ
앞으로 한동안 식당이 나올 것 같지 않아서 비상식량을 꺼냈다.
자유시간!!
(김유신 장군 태실 가기 전 슈퍼에서 샀던 아이템이다)
훈련소땐 이거 하나에 환장해서 매일 행군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는데..ㅋㅋ
심지어 포장지도 안버리고 내무실에서 동기들이랑 초콜렛 냄새 맡으며 변태처럼 좋아했던 기억이..
비상식량 맛나게 먹고 잠시 쉬고 있으려니 비가 다시 잠잠해져서 출발!
조금만 더 가면 삽교호.
그 전에 식당 하나 안나오겠나 설마?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만 같은 날씨다.
다행이 아까와 같은 굵은 빗줄기는 더이상 내리지 않았다.
그렇게 걷다보니 어느새 닿은 삽교천 초입
근처 백반집으로 가서 밥먹으면서 핸드폰 충전도 하고..
맨날 국밥 먹다가 반찬이랑 같이 밥을 먹으니 참 맛있다.
대충 먹고 있는데, 식당 이모가 물어본다.
'진짜 궁금해서 묻는건데 그런 여행은 왜 하는 거에요?
자전거나 대중교통으로 하는 여행은 괜찮을 것 같은데 도보여행은 너무 고생인거 같아..
삼촌은 왜해?
순간 얼음.
내가 이거 왜하지?
이 짓을 뭐하러?
사서 고생?
친구놈들도 했던 물음들.
그냥 웃으면서 대답한다.
'지금 아니면 못할 것 같고.. 그냥, 그냥 하고싶어서요 ㅎㅎ'
'그렇구나, 난 자전거 여행을 한번 해보고 싶었거든 ㅎㅎ'
음..
진짜 내가 왜 시작했지?
아마도 작년에 자전거 여행을 못가게 된 뒤로, 장기간의 국내 여행을 계획했는데..
왜 자전거에서 도보여행으로 바꾼건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친구들에게 같이 가자고 얘기했더니 친구놈들이 미쳤다고 했다.
그냥 자전거로 갔다 오라고.
그 시간에 공부나 하고 토익이나 하라고.
자격증 공부나 하고..
근데 남들 다하는거 똑같이 하면 재미 없잖아..ㅋㅋ
(그래서 이렇게 찌질하게 사나보다)
뭐 모르겠다.
다 각자 하고픈게 다른거고 생각도 다르니까
식사를 마치고 드디어 삽교호를 지난다.
시골 내려갈때마다 차로만 지나갔었는데 드디어 걸어서 지나가다니!!
총길이 4km 정도.
좋다.
바람도 적당하고..
날씨는 구질구질하지만 비도 안오고..
갈매기? 로 보이는 새들이 마구 날아다니길래 사진을 마구 찍어댔다.
근데 어렵다.
역시 초보자한테는...
그렇게 찍은 새 사진들 몇장.
대충 찍으면서 천천히 걷다보니 드디어!
당진이닷!
다시 새들 찍으면서 천천히 걷는다.
구름을 보아하니 조만간 비가 올것만 같다.
끝무렵에는 새들이 바글바글.. 무섭다.
히치콕의 소설 '새'를 보고 있는것 같다.
거의 끝에 다다랐을 무렵
아까의 예감이 적중했다.
비가 엄청나게 쏟아진다.
갈매기 밥주러 나와있던 사람들이 갑자기 쏟아지는 비에 혼비백산해서 차로 들어간다.
우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없다.. ㅎㅎ
크크.. 난 볼거 다봤다.
사람들이 갑자기 쏟아지는 비에 놀라서 막 달아다는 모습을 보며.. 혼자 웃었다.
미친놈 같다.
마침 쉴시간도 되어
마침 쉴시간도 되었고 해서,
끝에 지붕있는곳으로 가서 비를 피한다.
흠.. 이제 . 서산쪽으로 방향을 잡아볼까나..
5시 즈음이니 .. 뭐 가다가 아무데서나 자지 뭐..
비가 조금 사그라 들어서 우의 입기도 귀찬아서 그냥 대충 맞으면서 간다.
그렇게 걷다보니 .. 6시 즈음. 슬슬 잘곳을 찾아볼까..
오늘은 비를 맞았으니, 실내에서 자고 싶은데.. 흠.. 어제 마을회관 도전을 한방에 성공한 까닭에 ..
열정에 불타오른다.. ( 이 열정... .. 정말... 하하... .. 크나큰 실수였다)
시간이 저녁시간대가 넘은지라, 회관가봐야 사람이 없을 것 같아서..
바로 이장님댁을 찾아댕겼다. 어르신들께 물어물어 찾아간 이장님댁.
가족끼리 TV 시청중이셨는데.. 흠.. 상황설명하고 , 여쭤보니.
노인회장한테 물어봐야 된다고 하신다.. 일단 기다리라고..
전화 통화 하시더니...
어려울 것 같다고 한다. 흠.
뭐 .. 그럴수도 있지!
..
.
문밖 까지 따라나오셔서 미안하다고 하시는데 뭐, 난 괜찮다!
지도를 보니.. 옆 마을 마을회관도 그리 멀리 떨어져있지 않았으니.
당차게 옆 마을 이장님댁을 찾아간다. 마을이 은근히 넓고,
해가 떨어지려고 하니 어르신들도 집안으로 들어가셔서 찾기 힘들다...
흠 날은 어두워져 가는데.. 빨리 찾아야 좋을텐데,
어르신 한분께 이장님 댁 위치를 들었지만 도통 못찾을 것 같아서,
결국 마을 주민분께 이장님 번호 획득!
이장님 댁으로 보이는 집 앞으로 가서 전화를 한다. 근데 왠지 사람냄새가 안난다.
통화를 하는데.. 하하..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지금 서울이란다.
그리고 그건 노인회가 알아서 하는 거라고..
원래 마을이장이면 거의 어느정도 소관이 있는거 아닌가 ㅠㅠ
결국 이장님댁을 찾으러 돌아댕기며 지나가다 본..
최후의 보루.. 자그마한 교회로 간다.
문을 두드린다.. 불켜져 있고 인기척이 있다.
대답이 없다. 다시 문을 두드린다.
'누구세요? ' / ' 아.. 네.. 여행중인 학생인데요, 오늘 하루 묵을 수 있을까 해서요'
' 아.. 힘들것 같은데..' / ' 아..네...'
좌절한다. 최후의 보루가.
..
심지어 문도 안열어 봤다.
나 나쁜사람 아닌데 ㅠㅠ
그래도 문은 열고 대화좀 해주지..
시간은 아홉시를 넘기고.. 결국 두시간동안 마을안에서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시간을 죽였다.
애초에 두시간을 걸었으면, 초등학교에서 씼고 편히 쉬고 있을 시간인데.
급 짜증이 밀려왔다. 오늘 아침 출발할때만 해도 , 태안 시골에 도착하면
텐트는 집으로 보내버릴까? 생각했던 내가 우스웠다.. ㅋㅋ 텐트는 복귀할때까지 필수 아이템으로 간직해야할듯..
결국 처음에 물어본 마을회관 옆 정자에서 텐트치고 자기로 한다.
다시 그 마을회관으로 가다보니, 구제역 돼지 매몰지가 있었다.
작년 구제역때 여기도 휩쓸었나...? 돼지 800마리 매몰지.......
이것때문에 더 ... 경계심을 풀지 못했나 보다.
뭐.. 그랬을 수도 있지.
마을회관 옆 정자로 가서 . 텐트를 치고..
귀찬아서 일기도 안쓰고 .. 라디오 조금 듣고..
하하.. 솔직히 자려고 누워서 생각해보니 노인회장님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ㅠㅠ
씻고는 싶었는데.. 그래도 이게 내 팔자인걸 우짜나.
잠이나 자자..
도보경로 : 용두 2리 마을회관 - 아산 - 삽교호 - 당진 남산1리 마을회관